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택
선교장의 터는 율곡 이이(李珥)가 탄생한 오죽헌으로부터 1.5km, 허균(許筠, 1569~1618)이 나서 자란 초당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2km 떨어져 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 하여 '배다리(船橋里:선교리)'라는 이름을 가진 곳인데, 이 이름에서 비롯한 선교장은 지금은 논으로 변했지만 1981년까지만 해도 경포호였던 호수로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고 한다.
무경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이씨가의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다. 이씨가의 중흥기는 무경의 아들 자영(子榮) 이시춘(李時春, 1736~1785)과 손자 오은(鰲隱) 이후(李垕, 1773~1832) 때였다. 주위에서는 좋은 터를 잡은 덕분이라고 했다. 영동은 물론 강원도 일대의 상당 부분이 이씨가의 소유여서 '만석꾼'이란 칭호를 들었다. 당시 농사지을 만한 평야가 좁고 척박한 이곳에서 '만석꾼'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석꾼의 토지를 소유한 선교장은 당시 지역을 나누어 주문진 북쪽에서 생산되는 수확은 북촌에서 저장했고, 강릉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수확은 남촌에서 저장토록 했다. 다만 정동(경포면 일대)을 중심으로 한 강릉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확만을 본가에서 수납 저장했다.
당시 선교장의 소유 토지가 얼마나 넓던지 동대문에서 강릉까지 갈 때 남의 땅을 밟지 안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교장 소유의 토지는 북으로는 양양, 남으로는 삼척, 동으로는 동해 바닷가까지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대관령을 넘어 평창까지 이어져 추수를 했다고 한다.
무경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선교장은 여러 대에 걸쳐 많은 집들이 지어졌다. 선교장은 대지 3만평의 규모에 건물들이 '한일(一)'자 형태로 중세의 한옥 고성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당과 정자까지 갖춘 완벽한 99칸짜리 조선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큰 대문을 비롯한 열 두 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지난 300여 년 동안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민간주택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국가 중요민속문화자료 제5호, 1965년 지정)로 지정되어있다.
몇 백 년 된 푸른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붉은 배롱나무 꽃과 연꽃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선교장은 한국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명당이다. 이 분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선교장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고 있다.